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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에 얽매이지 않는 ‘나’는 어디에? 재일 코리안 기자가 세계를 여행하며 찾은 답

Re:search 歩く・考える 更新日: 公開日:
소 코스케(宋光祐·송광우)
「세계를 여행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품고 사는 사람들과 만나 용기를 얻었다.」
출생지·일본/국적·한국/주거지·일본(촬영·도야마 도시키)

*디아스포라(Diaspora)
디아스포라는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다. 원래는 팔레스타인 이외의 땅으로 이주한 유대인과 그 사회를 뜻하는데, 지금은 유대인에 국한하지 않고 고향이나 조국의 땅을 떠나 사는 사람들과 그 공동체를 뜻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한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나

최근 몇 개월 사이 왜 그런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 대법원이 일본기업에 배상을 명령한 징용공 소송과 한국군과 해상자위대 사이의 레이더 조사 문제로 일본과 한국 사이의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험악하기 때문이다.

나의 조부모님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당시 식민지 지배를 받던 조선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한국의 혈통을 가진 일본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한일관계가 나빠질 때마다 복잡한 기분이 든다. 솔직히 말을 꺼내기도 어렵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넌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해?”라고 물으면, “일본도 한국도 아닌 재일은 재일”이라고 대답해 왔다. 어느 나라에도 귀속하지 않은 존재. 그것이 나에게는 재일 코리안이다. 그렇기에 나는 본명을 일본어 발음으로 고수해왔고, 한국인으로서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때마다 반발해 왔다.

2001년 외국인등록증(외등증)을 그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수취인으로 보냈다. 외국인등록증은 면허증과 똑같은 크기의 카드로 일본에 사는 모든 외국인의 신분증이다.
2012년 외국인등록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항상 의무적으로 가지고 다녀야 했고, 소지하지 않으면 벌칙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코리안에게 외국인등록증은 자신이 외국인임을 재차 확인하는 증표이기도 했다. 국가에 외국인등록증을 반납하는 것은 휴대하지 않고 있음을 공개함으로써 상시 휴대 의무에 항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실 우연히 알게 된 운동 참가자들의 권유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의무 사항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 내가 항의하고 싶은 분노의 대상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반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영사관에 여권을 신청하는데 창구 직원이 신분증으로 외국인등록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소지하지 않은 이유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해 주지 않았고, ‘휴대하는 것은 의무’라고 지적했다. ‘같은 한국인이면서 재일 코리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내가 귀속해 있는 나라로부터 거절당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창구 직원은 일본 법률에 따라서 대응했을 뿐이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외국인등록증을 둘러싼 이러한 경험은 한국에 대한 ‘조국’의 애착마저 떨어지게 하는 계기가 됐다. 순수 한국인과 재일 코리안인 나 사이의 차이를 깨닫고 솔직히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됐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 국적은 여전히 한국이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태어난 아이는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 나도 절차를 밟으면 일본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자문해 보아도 마음만 답답할 뿐이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세계는 전쟁이나 이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조국과 자신의 뿌리가 있는 나라를 떠나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가 있다.

<b>에크뢰프(Anne Eklöf)</b>(왼쪽)와<b>클라라노르베리(Clara Norberg)</b>(오른쪽)<br> 「나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두 나라에 귀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클라라·Clara)<br> 출생지・한국/국적・스웨덴/거주지・스웨덴

국적과 정체성의 엇갈림은 재일 코리안만의 고민은 아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에 남은 ‘부의 역사’ 책임

역사 인식을 둘러싼 맥락에서 일본과 한국, 프랑스와 독일 관계를 비교하지만, 그보다 프랑스와 알제리에 더 가깝다. 3년 전 회사에 1년 정도 휴직계를 내고 파리 대학에서 현대사를 배웠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프랑스와 알제리에도 종주국과 식민지였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일 코리안의 뿌리는 1910년 시작된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배국과 식민국.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다가도 자신이 귀속할 나라를 선택할라치면 몇 세대가 지났는데도 청산되지 않는 ‘부의 역사’가 무거운 책임으로 변한다. 일본을 택하면, 한국 혹은 재일 코리안을 배신하는 기분이 든다. 두 나라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더더욱 어느 쪽도 선택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프랑스에도 두 나라 사이에 가혹한 운명을 살아온 이들이 있다. 하르키(Harki·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 측에서 싸운 알제리인 및 프랑스계 알제리인들)라고 불리는 알제리계 프랑스인이다. 재일 코리안과의 공통점을 느끼고 그들을 찾아갔다.

파리에서 떼제베(TGV)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약 2시간을 달려 프랑스 소뮈르역 플랫폼에 내렸는데 타옙 카셈 (Tayeb Kacem)(64)씨가 달려와 나를 반갑게 맞았다.

타옙(Tayeb)은 8살이던 1963년 북아프리카의 옛 프랑스 알제리에서 가족 전원이 프랑스 본토로 이주했다. 처음 만나는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 아내 파에라 바그다드(51)와 알제리 요리를 대접해주었다. 그의 집까지 걸어가면서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문화도 세대도 다른데 비슷한 점이 있다며 의기투합했다.

<b>타옙 카셈 (Tayeb Kacem)</b><br> 「어린 시절 잊어버렸던 아랍어를 어른이 되어서 다시 공부했다.」<br> 출생지·구 프랑스령 알제리/국적·프랑스/거주지·프랑스

하르키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이어진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종주국이던 프랑스 측 보충병과 행정직원으로 일한 사람을 부르는 현지인들의 호칭이다. 그 수는 수십만 명에 이른다. 독립을 이룬 조국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생명의 위협을 받는 바람에 그중 수만 명은 1962년부터 1964년 2년에 걸쳐 고향 집과 땅을 버리고 프랑스 본토로 피신해 왔다.

타옙(Tayeb)는 프랑스의 전직 군인이다. 걸프전 때 이라크 등에서 병사로 일했다. 그에게 정체성에 관해 묻자 “난 프랑스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프랑스를 위해서 전쟁터에 갈 수 없지”라고 즉답했다.

하르키에 붙은 배신자 낙인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금도 알제리에서는 그들의 성장 과정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다. 프랑스에서도 하르키라고 하면 ‘조국을 배신한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b>하미드 케마체(Hamid Khemache)</b>(오른쪽)와 <b>사브리나(Sabrina)부녀</b><br> 「하르키의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사브리나·Sabrina)<br> 출생지・구 프랑스령 알제리와 프랑스/국적・프랑스/거주지・프랑스

게다가 그 당시 프랑스 정부는 지중해를 건너온 하르키를 반겨주지 않았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산간 지역 캠프에 수용하며 텐트 생활을 강요했다. 프랑스어를 하지 못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지금도 어려운 삶을 사는 하르키와 그 후손들도 많다.

냉혹한 국가의 처사를 몸으로 맛보았는데 어떻게 그 나라를 자기 나라라고 부르며 목숨까지 바칠 수 있겠는가. 억지로라도 군인이 되어 ‘진짜 프랑스인’이 되려고 한 것은아닐까. 그의 말에 수긍하지 못하고 질문을 거듭하니 이제는 반대로 타옙(Tayeb)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언젠가 한국에 살 생각은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답했고, 타옙(Tayeb)은 “그럼 넌 일본인이야.”라고 단언했다. 오히려 내 안에서는 회피해 왔던 말을 결론짓듯 말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반박할 수 없었다. 역시 일본 국적을 취득해야 맞는 것일까…….

<b>알파티아 푸디(Fatiha Foudi)</b><br> 「동료와 함께 하르키의 역사를 알려 나갈 것이다」<br> 출생지・구 프랑스령 알제리/국적・프랑스/거주지・프랑스

프랑스 남서부 페리고르 지방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하르키 그룹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 참석해 준 8명 중 타옙(Tayeb) 여동생 아이샤(Aïchä)(60)가 있었다.
자신을 프랑스인이라고 단언한 오빠와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프랑스어로 ‘유랑자’ 일명 ‘조국을 떠난 사람 (데라시네·Déraciné)’이라고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난 아직도 거처를 찾고 있어요”

<b>아이샤 카셈(Aïchä Kacem)</b><br>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에서 지금도 거처를 찾고 있다」<br> 출생지・구 프랑스령 알제리/국적・프랑스/출생지・프랑스

아버지 뜻에 따라 16세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6명 낳아 키웠다. 되돌아볼 여유도 없이 살아온 아이샤(Aïchä)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 계기는 20년 전 뇌종양으로 사망한 동생이 죽기 며칠 전 병상에서 남긴 말 때문이다. ‘나는 정말 프랑스인인가….’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아이샤(Aïchä)와 같은 존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부인하는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다. 2015년 1월 프랑스 파리, 주간 신문 <샤를리 에브도> 본사에 북아프라카계 이슬람 과격파 테러리스트가 습격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외모 때문에 의심받는 일이 늘었다. “태어날 때부터 줄곧 프랑스인이었는데 주변에서는 내가 프랑스인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녀는 자신이 자라온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괴로움을 호소했다.

아이샤(Aïchä)는 프랑스 국적을 가진 진정한 프랑스 인이다. 그런데 뿌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프랑스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녀의 상황을 내 입장에 대입해봤다. 왜 일본 국적 취득의 결정을 못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재일 코리안을 비하하는 글이 넘쳐나고 거리에서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증오)가 이어진다.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면 일본인으로 받아들여질까. 한국을 버리는 것보다 그 불안감이 더 큰지도 모른다.

<b>크리스티안·페네치(Christian Fenech)</b>(오른쪽 끝) 일가<br>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한 집안의 체험을 기록하고 싶다.」<br> 출생지・구 프랑스령 알제리와 프랑스/국적・프랑스/거주지・프랑스

■’○○인’의 조건

한국인, 일본인, 프랑스인……. 도대체 사람이 ‘○○인’이라고 불리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출생 시 국적을 부여받을 수 있는 주요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 나라의 부모에게 태어난 ‘혈통주의’, 다른 하나는 부모의 국적과 관계없이 그 나라에서 태어난 ‘출생지주의’다. 일본은 부모 중 한쪽이 자국민이라는 조건으로 국적을 부여하는 ‘혈통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는 일이 흔치 않은 시대라면, 어떤 나라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국적이라는 ‘증명’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복수의 뿌리를 두는 것이 흔해진 지금 국적만으로는 귀속의식의 증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샤(Aïch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잔혹함을 느꼈다.

예전에 독일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혈통주의’를 국적 조건으로 삼았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남유럽과 터키,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유입된 노동자들의 자손을 비롯해 독일 내에는 외국인이 증가했다. 2000년에는 조건은 붙지만, 부모 국적과 상관없이 독일에서 태어난 자녀에게 독일 국적을 부여하는 ‘출생지주의’를 추가했다. 이에 더해 2005년에는 이민법을 시행해 외국인 체류 요건 등을 간소화하는 한편 독일어 학습을 의무화하고 독일에 정주하는 이민 입장을 법적으로 명확히 밝혀 ‘이민 국가’가 됐다. 지금은 이민자와 외국인이 인구의 20%를 넘는다.

<b>베튈 달만-하마노(Betül Dalman-Hamano)</b><br> 「나는 누군가 여러 국적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br> 출생지・독일/국적・독일과 터키/거주지・독일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느껴지는 지난해 12월 초, 파리에서 기차로 약 5시간 걸리는 독일 서부의 탄광 도시 뒤스부르크시를 방문했다. 시의 센터에서 이민자 대상으로 독일어와 문화 강좌를 여는 시민 단체를 지원한다고 해서 찾아갔다. 취재를 목적으로 갔는데 뜻밖에 나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센터장 마리오 테르지치(Marijo Terzic)(50)다. 아버지는 노동자로 독일에 온 크로아티아인이고, 독일에 산 지 48년이나 되었지만, 국적은 여전히 크로아티아인이다.

<b>마리오 테르지치(Marijo Terzic)</b><br> 「세계는 트랜스컬쳐(Transculture·국경을 초월한 문화), 하나의 민족으로 나라는 성립되지 않는다.」<br> 출생지・크로아티아/국적・크로아티아/거주지・독일

과감히 그에게 물었다. 왜 독일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가?
“독일인이 되기 위해 크로아티아를 버릴 수 없죠. 외국인으로 살아온 것도 내 정체성이니까요.” 그가 안내해 준 시민 단체에는 아시아 여성들이 색종이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물을 만들고 있었다. 모두 한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다.

모임의 주최자 서신선(67) 씨는 1973년 간호사로 이곳에 일하러 왔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 외국에 갈 수 있다는 모집 광고를 보고 응모했다고 한다. 3년 후 귀국할 생각이었지만 현지에서 알게 된 독일인과 결혼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지금은 독일 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b>서신선</b><br> 「마음은 여전히 한국」<br> 출생지・한국/국적・독일/거주지・독일

짧게 이곳에 온 배경을 이야기한 뒤 그녀는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한국”이라고 덧붙여 말하며 웃었다. 이민 국가를 표방하는 독일에도 독일인 부모에게 태어난 순수 독일인이라는 의미의 ‘유기농 독일인 (Biodeutsche)’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태생도 성장도 똑같은 독일인이지만 순수 독일인과 외국계 독일인을 구분 짓는 말인 셈이다.

그런데도 세대도 인종도 자란 배경도 다른 서씨와 테르지치(Terzic)씨가 웃는 얼굴로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면 독일은 ‘마음은 한국’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포용의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이너리티(minority)에 대해 지금의 일본은 이와 같은 너그러움이 있을까.

■‘이중문화 (Bicultural)’ 지향

내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한국이다. 이국에서 ‘조국’으로 이주를 결정한 디아스포라 코리안을 만나기 위해서다.
한국에는 5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한국 전쟁으로 인해 전재 고아와 미혼모 자녀 등 약 20만 명의 어린이가 미국과 유럽에 양자로 입양되었다. 안네 카트리드 셀링 (Anne Katrine Salling)(45)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태어난 후 바로 덴마크 가정에 양딸로 입양돼 덴마크 사람으로 자랐다.

<b>안네 카트리드 셀링 (Anne Katrine Salling)</b><br> 「어느 나라에도 아닌 단순한 외국인으로 있을 수 있기에 여행이 좋다.」<br> 출생지・한국/국적・덴마크/거주지・한국

조국인 한국에 온 것은 6년 전이다. 백인이 대부분인 덴마크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피부색으로 차별받을 일이 없어서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반면 한국에 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신이 덴마크인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는 그녀. “일부러 한국인처럼 행동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덴마크인, 한국인, 외국인 주위 상황에 따라 속성을 맞추는 게 나답게 있을 수 있어요.”

조국에 살면서 재일 코리안으로서의 자신을 다시 생각하게 된 사람도 있다.

고베시에서 나고 자란 박향수(朴香樹)(47) 씨는 1999년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서울에서 살기 시작했다. 2000년대부터는 한류 붐과 함께 재일 코리안 여성이 결혼 등으로 조국에 오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b>박향수(朴香樹)</b><br> 「소수파로서 보이는 것도 있다. 재일 코리안으로 태어나서 좋다」<br> 출생지・일본/국적・한국/거주지・한국

20년 전 처음 한국에 와서 보통 한국인이 재일 코리안의 존재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남편조차 그녀의 성장 과정을 듣기 전까지 재일 코리안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한다. 2009년에는 남편이 도쿄로 발령을 받아 4년간 일본에 살았다. 태어나고 자란 재일 코리안 커뮤니티가 아닌 외국인 주재원 가족으로 살아보니 일본이 예전과 달리 살기 좋은 곳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한국에서 생활하는 탈북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포함해 재일, 탈북자, 외국인의 이야기를 유튜브에도 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도 소수자다. 그렇기에 각 나라의 다수파에는 없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국적이 그 사람의 법적 지위를 결정하는 이상 ‘나라가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할 수 없다. 재일 코리안은 이 점도 고려하여 정체성을 선택해야 할 시기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해 연구하는 홍익대학교 김웅기 교수(50)는 이렇게 지적한다.

<b>김웅기(金雄基)</b><br> 「조국의 언어 ‘한국어’를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하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br> 출생지・일본/국적・한국/거주지・한국

한국은 2012년부터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에 재외 국민 투표가 가능해졌다. 재일 코리안도 민주주의의 권리를 행사해 조국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생각이다.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한국계 일본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한일 양쪽의 언어와 문화를 익힌 이중 문화(biculture)가 된다면 경계의 폭은 넓어진다. 차별받았다고 선택권을 얻지 못하는 시대가 아니다.” 어느 쪽의 국적을 취하든 중요한 것은 한일 양쪽의 정체성을 긍정하고 육성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을 들으니 격려를 받은 것 같았다.

■여정을 마치며 

“이제 일본 국적을 취득해도 되겠다.” 몇 년 전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오사카 코리아타운 본가에서는 어릴 적 친척 어른들의 대화에서 한국어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만드는 음식에는 한국과 일본 양쪽 메뉴가 있었고, 생활 속에서도 항상 두 나라의 문화가 섞여 있었다.

지금은 본가를 나와 산 지도 오래되어 일상에서조차 한국과 멀어지고 있다. 아버지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일본인이 되는 편이 낫겠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호한 답변밖에 할 수 없었다.

한창 이 기사를 작성하던 지난 1월, 4년 전부터 지병으로 입원해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한국에는 가 본 적도 없으면서 마치 살았던 사람처럼 한국의 관례를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한국에서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나에게 있어서 국적은 그렇게 쌓인 추억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이대로 살아가 보려고 한다. 여행길에서 만난 디아스포라들도 끊임없이 고민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어 국적의 무게로부터 조금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문중 존칭 생략)

[원문 기사]https://globe.asahi.com/article/12118436

번역: 박수진